울산의 밤은 잠들지 않는다. 밤이 되면 석유화학 공단을 메운 타워와 배관 시설을 따라 수만 개의 조명이 켜지고, 거대하고 웅장한 빛의 도시가 드러난다.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 서면 이곳이 대한민국을 성장시킨 중화학 공업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이 도시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산 장생포는 밤마다 고래 소리가 들려오던 한적한 포경 마을에 불과했다. 조용한 어촌이었던 이곳은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산업의 심장부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
| 대한민국 중화학 공업이 시작된 ‘국내 1호 특정공업지구’
반전의 시발점은 6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 1월 27일, 대한민국 정부가 울산을 ‘국내 1호 특정공업지구’로 결정·공포했고, 일주일 뒤인 2월 3일 울산 남구 매암동 납도마을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인구 8만 5천 명에 불과했던 소도시 울산에 3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몰려들어 그 역사적인 출발을 지켜보았다. 기공식이 열린 매암동의 열기는 곧 실제 부지인 고사동 일대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첫 정유공장을 세우기 위한 발걸음도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대한민국 공업화의 거점으로 울산이 낙점된 데에는 지리적 조건이 결정적이었다. 원유를 실은 대형 유조선이 바짝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은 자연항을 갖추고 있었고, 대규모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필수적인 공업용수를 태화강이 안정적으로 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이 맞아떨어지며 울산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에너지와 석유화학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로 변모하는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 대한석유공사에서 SK이노베이션으로 이어지는 발자취
이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서 대한민국 석유산업의 첫 장을 연 주역이 바로 오늘날 SK이노베이션의 초석이 된 대한석유공사(유공)였다.
1962년 10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국내 첫 국영 정유기업으로 출범한 대한석유공사는 이듬해 울산 고사동 들판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공장 건설이라는 첫 삽을 떴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했던 시절이었지만, 미국 걸프(Gulf)사와의 합작을 거쳐 차근차근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1964년, 하루 3만 5천 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제1 상압증류시설(제1 정유공장)’이 준공되며 본격적인 상업 가동에 들어갔다. 조용하던 울산 들판 위에 들어선 이 작은 공장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자급자족의 시대를 열어준 뜻깊은 출발점이었다. 이후 1980년 선경(현 SK그룹)의 인수를 거치며 석유에서 섬유까지 이어지는 독자적인 사업 체계를 완성했고, 6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하루 약 84만 배럴을 정제하는 글로벌 석유화학 거점 ‘SK이노베이션 울산Complex'(이하 울산CLX)의 기틀이 되었다.

| 여의도 3배 부지에 펼쳐진 60만 km 파이프라인의 힘
울산 남구 용연·고사동 일대에 들어서면 축구장 1,100여 개를 합쳐놓은 듯한 거대한 단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울산CLX이다. 여의도 면적의 3배(약 826만㎡)에 달하는 이곳은 단일 석유화학 복합단지 기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SK에너지, SK지오센트릭, SK엔무브 등 SK의 핵심 에너지·화학 자회사들이 밀집해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이룬다. 부두로 들어온 원유는 해저 파이프라인을 타고 올라와 하루 약 84만 배럴씩 정제되고, 이 과정에서 나온 원료들은 연간 약 770만 톤의 석유화학 제품과 고성능 윤활유로 탈바꿈한다.
울산CLX 내부에 연결된 배관의 총길이만 약 60만 km. 약 38만km인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보다 더 긴 은빛 실핏줄을 따라,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연료와 소재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 땀방울이 녹아든 산업의 최전선, 푸른 숲과 장미를 품다
울산은 일하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가장 뜨겁게 느껴지는 도시다. 점심시간이 되면 안전모와 작업복 차림의 엔지니어들이 공단 인근 식당으로 모여들어 땀을 식히며 식사를 나눈다. 치열하게 대한민국 경제를 돌리는 이 현장감은 울산 특유의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지대의 그늘 속에서, 울산 시민들은 오랫동안 매연과 녹지 부족이라는 환경적 소외를 감내해야 했다. 이 깊은 결핍을 채운 것은 기업의 과감한 결단이었다.
1995년, SK 최종현 선대회장은 “SK가 울산 시민들의 성원으로 성장한 만큼, 시민들에게 그 결실을 되돌려드리고 싶다”며 대규모 공원 조성을 약속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도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10년간 약 1,020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해 364만㎡(약 110만 평) 규모의 ‘울산대공원’을 완성했고, 2006년 울산시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공원 조성 이후에도 SK와 울산의 상생은 계속되고 있다. 매년 5월 울산대공원 장미원에서 열리는 ‘울산대공원 장미축제’가 대표적이다. SK와 울산시가 공동으로 주최해온 이 축제는 300만 송이가 넘는 장미가 장관을 이루며 매년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울산의 대표 문화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삭막했던 공단 도시 한가운데 들어선 푸른 숲과 장미원, 호수는 이제 울산 사람들의 일상 속 가장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다. 산업도시 울산이 환경과 삶의 질을 함께 챙기는 도시로 변화하는 기점이자, 기업과 지역사회가 상생을 보여준 대표적인 모범 사례다.
| 친환경과 AI를 품고 미래로 달리는 울산
기업과 도시가 함께 만든 푸른 숲이 시민들의 삶을 바꾸었듯, 이제 울산은 산업의 체질 자체를 바꾸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에너지를 공급해 온 이 도시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혁신의 중심에는 울산CLX가 있다. 변화의 두 축은 바로 ‘친환경 에너지’와 ‘첨단 AI’다. 울산CLX은 기존 석유계 연료 중심에서 벗어나, 폐식용유 등을 활용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지속가능항공유(SAF)의 국내 첫 상업 생산에 나서며 하늘길의 친환경 바람을 끌어왔다. 여기에 수소 생산부터 저장, 유통으로 이어지는 청정 수소 생태계까지 구축하며 탄소 배출 감축 여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거대한 공장 내부의 풍경도 디지털 전환을 통해 영리하게 달라지는 중이다. 외부 솔루션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SK이노베이션이 60년간 현장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녹여 자체 개발한 ‘스마트플랜트 2.0’을 도입했다. 공정운전과 설비관리, SHE(안전/보건/환경) 분야에 AI와 DT를 적용한 40여개 스마트플랜트 2.0 과제를 울산CLX 현장에 적용하며 실질적인 기술 혁신을 이어가는 중이다. AI가 공정을 제어하고 로봇개와 드론이 현장의 안전을 살피는 풍경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약 90여명의 CDS(Citizen Data Scientist) 및 10여명의 AI/DT 전문가들이 현장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나간다.

여기에 2022년 최태원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돼 SK와 울산상공회의소가 공동 주최하고 울산시 등이 후원해 온 ‘울산포럼’을 통해 지역 중소기업들과 제조업의 AI 전환(AX) 생태계를 모색하며, 기술 혁신의 온기를 도시 전체로 넓혀가고 있다.
올해 5회째를 맞이하는 ‘2026 울산포럼’은 ‘Leading AX, Smart Life 울산’을 슬로건으로 ‘일터’와 ‘삶터’ 두 축을 중심으로 울산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오는 9월 11일(금) 울산전시컨벤션센터(UECO)에서 개최되며, 울산세계미래산업박람회(WAVE)와 공동 개최되어 제조AX와 스마트시티 전략을 직접 경험하고 체감할 수 있는 입체적인 장이 펼쳐질 예정이다.

고래가 헤엄치던 한적한 포구 마을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견인한 산업의 심장이 된 도시. 울산은 이제 AI라는 미래 엔진까지 달고, 글로벌 첨단 산업의 거점으로 또 한 번의 위대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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