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말 시작된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하 이란 전쟁)의 충격으로 먼 옛날의 일처럼 잊혀졌지만, 불과 3달 전인 2026년 1월, 미국 천연가스 가격은 북극 한파 영향으로 열흘 사이에 2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당시 기상 예보 변화에 따라 북미 천연가스 가격은 몇 시간 만에 50% 가까이 출렁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생활이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란 전쟁으로 인해 사상 최초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었습니다. 몇 달 전의 북극 한파에 따른 미국 천연가스 생산 차질 우려가 가격 급등으로 이어진 것처럼 중동 지역의 원유 수송 차질로 국제 유가가 전쟁 이전 대비 크게 상승했습니다. 사태 초기의 조기 종전 희망도 희미해졌습니다. 휴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호르무즈 해협은 50일 가까이 봉쇄되어 있습니다. 북극 한파에 따른 천연가스 생산 차질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됩니다. 정치적, 군사적,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이 어려워지는 양상입니다.

에너지 가격이 변하면 우리의 일상도 변합니다. 북극 한파가 미국 시민들의 외부 활동을 막고 난방비 부담을 키웠다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유가 상승은 전 세계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특히 미국, 유럽 등에서는 지난 부활절의 가족 모임마저 위축시켰을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오는 6월로 예정된 ‘2026 북중미 월드컵’의 흥행 역시 항공유 공급 부족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항공유 수출국입니다. 유전 하나 없이 100% 수입 원유에 의존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항공유 생산과 수출에서 확실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2~5위(미국, 네덜란드, 싱가포르, 인도 등) 항공유 수출국 대비 우리나라는 2배가량 많은 물량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대한석유협회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 41.1만 배럴(BPD)의 항공유를 생산해 그중 60%인 24.7만 배럴을 수출했습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한 미국 서부 해안(PADD 5)은 항공유 수입의 80% 이상을 한국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석유제품(항공유) 1위를 달리고 있는 일종의 역설인 셈입니다.
미국 PADD 5 지역은 로키산맥 등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역내 정유 설비에 작은 차질만 생겨도 휘발유 가격이 급등하는, 정유 제품 운송 측면에서 ‘고립된 섬’과 같습니다. 미국이 텍사스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항공유를 수입해 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국내 정유사의 가동률이 떨어져 항공유 수출이 중단될 경우, 미국 서부 지역은 육로 운송조차 사실상 불가능해 대체재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정유 설비 가동률 하락 등에 따른 항공유 생산 차질은 이미 가격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석유공사 통계(Petronet)에 따르면 전쟁 이전인 2026년 2월 항공유 가격은 $85~94/BBL 수준이었습니다. 개전 1주일 후 항공유 가격은 $200/BBL을 돌파했고, 3월 30일 사상 최고 가격인 $243/BBL을 기록했습니다. 항공유 가격은 한 달 만에 3배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2월 평균 가격($89/BBL) 대비 3월 평균 가격($195/BBL)은 2.2배 올랐습니다.
항공유 가격 상승으로 세계 항공 산업은 이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Bloomberg(4월 5일) 보도에 따르면, 국제공항협의회(ACI) 유럽 지부 관계자는 이란 전쟁 사태가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EU 지역의 항공유 대란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미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네치아 등 주요 공항은 공급 제한 주의보를 발령했으며, 루프트한자 등 주요 항공사들도 운항 축소를 검토 중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부 저가 항공사를 중심으로 운항 횟수 축소, 무급 휴직 등을 시행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항공유 부족 사태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카타르 에너지의 라스라판 LNG 터미널 파괴에 따른 대체 에너지 수요가 석탄을 넘어 경유와 벙커C유 등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에 따른 국내 정유사들의 미국 셰일 오일 등 대체 원유 도입 확대 과정에서도 항공유 생산량이 감소할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AI 산업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정유 산업과 AI 산업을 1:1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란 전쟁을 통해 국가와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휘발유/경유/항공유 등도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하루 300만 배럴의 석유가 별문제 없이 수송되고, 정제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고 있는 노력 덕분에 내수 수요가 채워지고, 항공유 시장에서도 세계 1위 지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사태를 통해 원유의 생산과 수송보다 정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상 초유의 호르무즈 봉쇄 상황에서 WTI나 브렌트 기준 석유 가격은 2008년 고점을 넘지 않았지만, 항공유와 경유 등 소비자가 직접 사용하는 정유 제품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6년 2월, 일본의 이데미츠 코산(Idemitsu Kosan)이 지난 25년간 추진해 온 정유 설비 감축 계획을 전격 취소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란 전쟁과 무관하게 현대 사회에서 정유 설비가 수행하는 역할이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신호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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