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이란 전쟁 장기화와 호르무즈 재봉쇄로 한계에 다다른 글로벌 비축유
■ 원유 수입량을 대폭 줄이며 유가 급등을 상쇄한 중국의 반전
■ 수급 불안을 넘어 중국의 에너지 자립이 가져올 석유 시장의 재편
중동을 대표하는 고전 문학 가운데 하나가 아라비안나이트라 불리는 『천일야화』다. 대신의 딸 세에라자드는 왕에게 1,000일하고도 하룻밤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마음을 바꾸고, 마침내 폭정을 멈추게 한다. 『천일야화』에 담긴 300편이 넘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예상을 뛰어넘는다.
『천일야화』의 ‘1,001일’은 이야기가 지속되는 시간인 동시에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시간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중동의 변화도 지난 7월 3일 1,001일을 맞았다. 그 전개 역시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천일야화의 서사는 1,001일에 걸쳐 끝을 맺었지만, 지금의 이야기는 1,001일을 훌쩍 넘긴 뒤에도 결말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진행 중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올해 2월 말 시작된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있다.
| 미·이란 양해각서로 마침내 열린 호르무즈, 뜻밖의 공급과잉으로 이어진 이유?
6월 17일 미국과 이란의 양해각서 체결로 원유 시장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루 최대 40척의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면서 페르시아만에 갇혀 있던 약 6,000만 배럴의 원유가 시장에 공급되었다. 해협 봉쇄 와중에도 우회 송유관을 통해 원유 생산을 이어오던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각각 630만 배럴과 390만 배럴의 수출량을 기록하면서 2025년 수준을 회복했다. 저장 공간 부족으로 인한 유정 폐쇄로 당초 생산 재개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던 쿠웨이트, 이라크 등도 예상보다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으로부터 60일간의 원유 수출에 대한 제재 면제 조치를 얻어낸 이란이 역대 최대 수준의 생산량을 기록하면서 원유 시장은 공급과잉을 우려하게 되었다.
| 미-이란 교전 재개로 한계선에 다다른 글로벌 비축유, 유가는 왜 안 올랐을까?
하지만 미국과 이란의 교전이 재개되고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막히면서 원유 시장은 다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당장 걱정스러운 것은 바닥에 이른 비축유다. 3월 1일부터 4월 25일까지 세계적으로 원유 및 석유류 제품 재고는 하루 480만 배럴씩 감소하였다. 전쟁 이전 85억 배럴에 이르던 비축유 물량은 양해각서 체결과 휴전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6월에는 76억 배럴까지 감소하였을 것이다. 76억 배럴은 송유관, 정유시설 등 석유 관련 설비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는 한계선이다. 만약 이보다 비축 물량이 감소하여 68억 배럴 수준까지 낮아진다면 송유관 및 정유시설 운영 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휴전으로 중동산 원유 공급이 증가하였지만 비축유를 다시 채워놓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재개되면서 석유류 제품 수급이 다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제 원유 가격은 배럴당 85달러 수준을 유지하면서 이전의 배럴당 100달러보다 한참 아래에 머무르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와 더불어 지난 몇 달간의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적응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중동 이외의 지역에서의 공급량 확대와 더불어 호르무즈 해협 남쪽의 오만 영해를 이용한 유조선의 운항이 지속되면서 생각보다 공급 차질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에 더해 중국의 원유 수입량도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 시장은 예상보다 충격이 크지 않다는 점을 경험했다.
| 유가 급등을 상쇄한 중국의 원유 수입 급감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중국의 수입량 감소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크다는 점이다. 전쟁 이전 하루 평균 1,000~1,2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던 중국은 4월부터 급격히 수입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4월 820만 배럴로 감소한 중국의 원유 수입량은 5월 780만 배럴을 거쳐 6월에는 640만 배럴까지 감소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하루에 수입하는 원유가 약 550만 배럴인 것을 감안해 보면 중국의 수입 감소는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급격한 원유 수입 감소는 여러 가지 요소의 결합에 따른 것이다. 일단 중국은 이란 전쟁 이후 하루 100~200만 배럴 규모의 비축용 원유 물량 도입을 중단했다. 여기에 더해 최대 14억 배럴에 이르는 비축유를 활용하면서 원유 수입 감소 규모가 커졌다. 이와 더불어 가격 상승으로 인해 석유화학 분야에서의 원유 수요가 감소한 것도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대신 석탄화학 부문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관련 제품 수급 차질을 최소화하고 있다. 중국이 오랜 기간 동안 구축했던 에너지 위기 대응 시스템이 세계 원유시장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국내 산업 생산이 예상보다 훨씬 더 부진한 데 따른 수요 감소 결과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보여준 급격한 수요 감소는 세계 원유 수요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지난 2025년 국제에너지기구(IEA)와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모두 2050년까지 지속적으로 석유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OPEC의 경우 원유 수요가 하루 1억 2,300만 배럴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고, IEA도 이전의 10년 내 피크오일 도달 전망을 수정해 1억 1,300만 배럴까지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양측 모두 기존 원유 수요가 유지되고 개도국의 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가 더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보여준 급격한 수요 감소는 이러한 전망에 의문을 갖게 한다.
| 공급 부족에서 수요 감소로: 중국의 에너지 자립이 바꿀 석유 시장의 미래
최근 중국이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도입에서 보여준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양국이 2025년 건설에 합의한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을 통해 공급될 천연가스 가격에 대해 러시아 측은 기존과 유사한 1,000㎡당 250달러를 제시했는데 중국의 반응은 50달러였다. 중국의 천연가스 수요가 2030년대 중반이면 정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건설 기간 6년을 감안하면 러시아의 가스가 추가로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중국의 에너지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라 원유 소비도 증가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해 왔다. 하지만 중국의 모습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경제성장이 4%대 수준으로 둔화하면서 에너지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에너지 공급과 관련한 정책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원유 및 천연가스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해상 유전 개발 확대 및 서북부의 셰일가스 개발이 성과를 내고 있다. 전기차 보급 및 재생에너지 확대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향후 15년 동안 150기에 이르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석탄화력발전소 건설도 매주 1기씩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한 자체 생산 및 해외 도입 축소 기조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세계 시장에 대한 원유 공급은 UAE 증산과 더불어 브라질, 가이아나 등의 생산 확대가 더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전망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모습을 종합해 보면 향후 원유 수요에 대한 기존 전망이 계속 유효할 것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2014년 셰일 혁명 당시에도 시장은 비슷한 놀라움을 경험한 바 있다.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늘면서 공급 측 전망이 통째로 흔들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세계 최대 수입국인 중국의 수요 측 변화가 시장의 기존 상식을 뒤흔들고 있는 셈이다. 공급 충격에서 시작된 전쟁이 역설적으로 수요 구조의 변화를 앞당기는 촉매가 되고 있는 것이다. 1,0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중동의 전쟁은 에너지 시장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 충격의 끝은 공급부족과 가격 급등이 아닌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역사를 통해 보면 전쟁은 언제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갈등이 가져오는 단기 충격과 리스크 너머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 수요 및 이용 패턴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면서 장기적 변화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세에라자드의 이야기가 그랬듯, 이번 위기의 진짜 결말도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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