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산유국의 역설, 전 세계 ‘하늘길’ 주도하는 대한민국 정제 인프라의 위상
■ “한국산 항공유 없으면 美 서부 해안도 멈춘다”,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부상
■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초래한 원유 수급 마비, K-항공유에겐 ‘역설적 기회’ 될 수도
| 중동산 원유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구조, 그러나 항공유 없이는 세계 하늘이 멈춘다
2026년 3월,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이 출렁이는 동안 대한민국은 독특한 이중 압박에 직면했다. 한쪽에서는 호르무즈 봉쇄로 원유 공급이 막혔고, 다른 쪽에서는 세계가 한국의 항공유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구조.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원유를 못 사면 항공유를 못 만들고, 항공유를 못 팔면 한국 경제의 핵심 외화 수입원이 증발한다. 세계 최대 항공유 수출국이라는 타이틀이 이번 위기에서 특권이 되기도, 족쇄가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 숫자가 말하는 한국의 위치 – 항공유 세계 1위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 항공유 수출국이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항공유 생산량은 약 1억5000만 배럴이었고 이 가운데 9000만 배럴이 수출됐다. 단일 국가로서는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만큼 많은 항공유를 수출하지 않는다. 비산유국의 역설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전 세계 항공기들을 움직인다.
구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한국 정유사들은 하루 평균 약 24만6000 배럴의 항공유를 수출한다. 가솔린(32만6000 배럴/일)과 경유(55만3000 배럴/일)를 포함한 전체 석유제품 수출로 눈을 돌려보면 석유제품 분야는 항상 수출산업 순위 상위에 위치해 있었고, 올해 1분기만 놓고 보더라도 반도체·자동차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핵심 수출 품목이다. 전 세계에서 원유 정제를 통해 얻어지는 석유제품 수출 규모가 한국보다 많은 나라는 미국, 인도 등 4개국에 불과하다.
석유제품 수출 강국 대한민국의 이러한 성과를 뒷받침하는 것은 한국의 정제 인프라다. SK이노베이션(울산/인천, 일 111만5000 배럴), GS칼텍스(여수, 일 80만 배럴), S-OIL(온산, 일 66만9000 배럴), HD현대오일뱅크(대산, 일 52만 배럴)의 4대 정유사를 합산한 일간 처리 능력은 300만 배럴을 넘는다. 항공유 수출 1위, 석유제품 수출 5위의 명성은 세계 5위권 수준의 이러한 정제 규모에서 나온다.

| 항공유, 왜 특별한가 – 고부가가치의 속성
항공유는 정유사의 관점에서 단순한 제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중간 유분(kerosene fraction)을 추가 처리해 만드는 항공유는 휘발유나 경유보다도 품질 기준이 엄격한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글로벌 시장 조사 컨설팅 기관 모도르 인텔리전스(Mordor Intelligence)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2024년 4분기 항공유 마진이 전년 동기 대비 40% 높아졌다고 발표했다. GS칼텍스는 자사의 여수 수소화분해장치(hydrocracker)를 최적화해 항공유 수율을 18%까지 끌어올렸으며, S-OIL은 69억 달러를 투자한 샤힌(Shahin) 복합단지에서 2026년까지 20%의 항공유 수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이 기관은 밝혔다.
항공유 시장의 구조적 특성도 중요하다. 전 세계 항공유 생산량은 하루 약 750~800만 배럴이지만, 이 중 국제 수출 시장에 유입되는 물량은 20% 남짓하다. 교역 물량이 절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주요 공급 루트 하나가 막히면 가격이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 선택 여지 거의 없는 중동 의존도
항공유 수출 1위 국가의 아킬레스건은 원자재, 즉 원유 수급 구조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 정유사들이 들여오는 원유의 대부분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석유 수입의 60% 이상, LNG의 20%도 이 지역에서 온다.
IEA(국제에너지기구) 등에 따르면 중동 걸프 지역 원유 수출의 약 70~80%는 중국·일본·한국·대만 등 동아시아 4개국으로 향하며, 이 물량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 중 한국과 일본은 각각 약 10~15% 수준을 차지하는 핵심 수입국이다.
이번 호르무즈 위기는 이 취약성을 수치로 입증하고 있다. 에너지 물류 데이터 및 인텔리전스 기업인 보텍사(Vortexa)의 분석에 따르면, 2026년 3월 한국·일본·대만향 원유 수입이 전년 동기 대비 약 50% 감소했으며, 이 국가들의 원유 재고는 역대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 한국의 경우, 4월 초 재고가 전월 대비 약 13% 증가하며 계절 평균보다 약 10% 높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이는 초기에 전략비축유 방출과 대체 원유 확보에 주력한 결과라고 이 기업은 분석했다.

| 세계가 한국 항공유에 의존하는 이유 – 미국 서부 해안의 사례
한국 항공유 수출이 영향을 받을 경우 가장 먼저 부각되는 곳은 미국 서부 해안이다. 2025년 미국 서부 해안(PADD 5) 지역의 항공유 수입은 하루 9만3000 배럴이었으며, 이 중 한국산이 8만 배럴로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중국산 4000 배럴, 일본산 3000 배럴이 뒤를 이었다. 항공유 수입처의 지역 분포를 보면 알래스카 3만1000 배럴, 하와이 2만8000 배럴, 캘리포니아 2만2000 배럴이었으며, 2025년에는 캘리포니아 내 정제소 폐쇄 영향으로 수입이 1만2000 배럴 더 늘었다. 데이터 분석기관 케이플러(Kpler)의 수석 원유 분석가 매트 스미스는 “한국의 항공유 수출이 3월 들어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앞으로 더 둔화될 것”이라며 “이는 미국 서부 해안에 심각한 문제”라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서부 해안은 항공유 수입의 대부분을 아시아, 그것도 한국에 의존해 왔기에 한국 공급이 막히면 대체재가 사실상 거의 없는 상태였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2025년 한국의 항공유 대미 수출은 11개월 누계 3,840만 배럴로 전년 동기 대비 13.3% 증가한 상태였다.
한국의 항공유가 단순한 양자 교역 문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Vortexa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일본·대만의 원유 정제 제품 수출 중 미국 서부 해안이 수입하는 수송 연료의 55% 이상이 이들 3국에서 온다. 만약 원유 공급 부족으로 이들의 정제 가동률이 하락하면, 미국 서부 해안은 물론 호주·동남아시아까지 동반 타격을 받을 수 있다.
| 항공유 가격 폭등 – 위기 속 역설적 기회?
호르무즈 봉쇄 이후 항공유 가격은 폭발했다. 미국 국내 항공유 가격은 이란 전쟁 발발 전 갤런당 2.50달러에서 4월 2일 4.88달러로 거의 두 배가 됐다. 다른 지역에서는 상승폭이 더욱 가팔랐다.
동아시아 권역의 석유제품 가격 벤치마크이기도 한 싱가포르 시장에서는 항공유 가격이 3월 4일 배럴당 240.50달러로 153% 급등하며 가장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국 시장도 3월 13일 배럴당 167.75달러로 57% 상승했다. 이란 전쟁 발발 이후 글로벌 항공유 수출량은 60% 이상 급감해 하루 70만 배럴 미만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가격 공시 기구(PRA, Price Reporting Agency)인 어거스 미디어(Augus Media)는 한 트레이더의 말을 빌려 “다른 석유제품 생산 비율을 줄이고 항공유 비율을 높이는 동기 유인이 될 수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4월 초 선적분 항공유의 현물 거래 프리미엄은 싱가포르 현물 항공유 평가 대비 배럴당 20~30달러에 달한다.
중동의 정유 시설이 공격을 받고 중국과 태국이 수출을 중단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글로벌 항공유 공급의 사실상 마지막 보루로 부상해 있다. S&P글로벌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정유사들은 원료 공급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북미 고객들과의 항공유, 경유, 가솔린 공급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원료가 되는 고유황 중질 원유를 실어 나르는 유조선 운항이 계속 차단된다면 미래를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들어설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글로벌 항공유 시장의 구조적 문제
2025년 전 세계 항공유 소비량은 하루 778만 8000 배럴에 달했고, 2026년에는 799만 배럴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생산과 공급의 집중도는 편중되어 있다. 전 세계 항공유 생산 중 국제 수출 시장으로 나오는 물량은 하루 180만 배럴 가량이며, 이 중 세계 전체 해상 항공유 교역의 2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IEA에 따르면, 중동 걸프 지역 정유사들은 전쟁 이전 하루 330만 배럴의 정제 제품을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 이후 300만 배럴 이상의 정제 용량이 공격 피해와 수출 루트 차단으로 가동 중단됐다. 중간 유분(경유·항공유) 시장은 기타 제품 시장에 비해 이미 타이트한 상황이었으며, 걸프 지역 이외의 정유사들이 이 수요를 추가로 메울 여유는 사실상 거의 없는 상태였다.
|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
이번 위기는 한국에게 구조적 취약성과 함께 전략적 기회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번 위기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 수입 다변화 노력을 경주해 왔다. 이 과정에서 딜레마는 존재한다. 한국 정유사들이 갖추고 있는 설비 특성을 감안할 때 대체지역의 구조적 한계를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중동산 원유를 수입해 부가가치를 더해 전 세계에 항공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 이 비즈니스 모델의 강점은 정제 기술과 물류 효율성이고, 약점은 원료 조달의 지리적 편중이다.
호르무즈가 재개통되고 공급이 정상화되면, 고도의 정제 기술과 세계 최대 수출 네트워크를 보유한 한국 정유사들이 중동산 정제 공급 공백을 채울 최적의 위치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위기에 놓이면 취약점도 드러나지만 동시에 진짜 전략적 자산이 무엇인지도 나타난다. 전 세계가 한국의 항공유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항공유 물량의 부족은 항공유 생산에 강점을 지닌 이들에게 동시에 기회요인이기도 하다. Made in Korea 항공유가 세계 No.1의 위상을 더욱 굳혀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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