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타르 Pearl GTL(Gas-to-Liquids) 파괴가 야기한 글로벌 고급 윤활기유 공급망 마비
■ AI 데이터센터 액침 냉각·전기차·로봇 시장 등 첨단 산업 중심으로 새로운 수요 증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가 80일을 넘기고 있다. 5월 14~15일 열린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에서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오고 갔을 뿐, 평화적 해결 방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란 전쟁 개전 이후 휘발유, 경유, 항공유, LNG, 나프타, 비료/황 등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다양한 원료, 제품들이 이야기되었다. 실제로 항공유 가격 상승으로 세계 항공 운항 수요가 감소하고, 미국 등에서는 휘발유, 경유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일상생활 속에 확인되는 변화에 가려 깊이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윤활기유다.
2026년 3월 18일 이란의 미사일/드론 공격으로 카타르 라스라판(Ras Laffan) 산업 단지가 파괴되었다. LNG 수출 설비의 17%와 함께, Shell과 카타르에너지가 합작한 Pearl GTL(Gas-to-Liquids) 설비도 파괴되었다.
Pearl GTL에서는 천연가스를 이용해 석유 제품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윤활기유 중 황 함량 0.03% 이하의 최상위 품질(Group III) 제품이 생산되었다. 이란 공격으로 Pearl GTL의 두 개 트레인 중 하나가 손실되었지만, 현재는 안전과 통합 운영 이슈로 전체 설비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설비 복구에는 정확히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다. 카타르에너지 CEO도 최장 3-5년이 걸릴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루 약 3만 배럴 규모의 그룹3 윤활기유가 최소 2028년 시장에서 사라진 셈이다.
이미 영향은 현실화되고 있다. 윤활기유로 완제품인 윤활유를 생산하는 블렌더(Blender) 업체들의 가동 차질은 이미 시작됐다. 다른 정유/석유화학 제품과 달리 대체 공급원도 없고, 가동률을 높여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설비도 없다.
윤활기유 등급(Group) 간 품질 격차 때문이다. 윤활기유는 크게 3-4개 그룹으로 나뉜다. 그룹1과 2는 범용 등급이다. Pearl GTL에서 생산되던 것은 그룹3, 그중에서도 최상위인 그룹3+다. 윤활기유는 윤활유 완제품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기초원료이기에 윤활유 성능은 절대적으로 윤활기유에 영향을 받게 되며 그룹3 윤활기유는 고급 제품으로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냈다. 특히 환경 규제 강화, 엔진 성능 개선으로 점도가 낮고, 황 성분이 적어 그룹3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전기차 보급 확대 우려에 따른 제한적 정유 설비 증설 여파로 윤활기유 생산능력은 그만큼 늘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은 재고 부족이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은 그룹3 순수입국이다. 2025년 그룹3 수입에서 중동(카타르, UAE, 바레인) 비중이 40%를 상회했다. 2026년 1월에는 55%까지 올라갔다. 이 물량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서 수출되었다. 현재 미국 그룹3 수입의 70% 이상이 차질이 생겼다. Pearl GTL 파괴로 공급 차질 장기화는 사실상 확정적이다. Axios의 5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이미 가격도 $10/Gal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중동 의존도가 미국보다 높은 유럽은 이미 자동차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에 진입했다. 2025년 유럽의 그룹3 수입량의 72%가 중동산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신차 생산 과정에 투입할 엔진 오일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6월이면 재고가 소진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란 전쟁이 끝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카타르 Pearl GTL 설비 가동에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나라의 그룹3 생산 설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그룹3 생산 설비 규모는 단일 국가 기준 세계 최대 규모다. 현재 중동 외 지역에서 그룹3 윤활기유를 의미 있는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은 스페인(Repsol), 말레이시아(Petronas), 미국(ExxonMobil, Chevron) 등 일부 설비를 제외하면 사실상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전기차 보급 확대로 윤활기유 수요가 줄어들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유사들이 그룹3 설비를 유지/증설해 온 것이 결과적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그룹3 윤활기유는 그동안의 우려와 달리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수요처도 생겨나고 있다.
첫째, 데이터센터의 액침 냉각(Immersion Cooling) 시장이다. AI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면서, GPU 발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액침 냉각 아이디어가 부상하고 있다. 그룹3 윤활기유 응용 제품이 액침 소재의 후보 중 하나다. 현재 연구 개발과 실증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둘째, 전기차다. 많은 이들의 통념과 달리 전기차에도 윤활기유가 필요하다. 오히려 내연기관 차량보다 고사양이 요구된다. 분당 2만 회 이상 고속 회전하는 모터에는 고압과 고온에서도 점도와 절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룹3 이상의 윤활기유가 필요하다.
셋째, 공장 자동화와 로봇이다. 산업용 로봇의 감속기는 장시간 높은 마찰과 토크를 견뎌야 한다. 로봇의 수명 연장을 위해 그룹3 이상의 윤활기유가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상용화가 본격화되면 이 시장은 추가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에도 우리나라는 일상생활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 우리나라의 정유/석유화학 산업이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LPG 공급 차질로 가정에서 요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동남아시아는 나프타 크래커 가동 중단에 따른 생활용품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미국, 유럽 자동차 업체들조차 그룹3 윤활기유 공급 차질로 자동차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정유, 석유화학 설비뿐 아니라 그룹3 윤활기유 공급망까지 구축되어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에도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이다. 산업 관계자분들의 노력 속에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면서 오히려 우리나라 정유, 석유화학, 윤활기유 산업의 세계적 경쟁력과 중요성이 폄하되고 무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세계적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고, 설비 투자를 확대할 수 있는 사업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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