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도 지속되는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불안
■ 석유 비축·셰일가스 생산 확대 등 에너지 안보 강화 움직임 본격화
■ 전기차·BESS를 넘어 드론·무인 무기까지 확장되는 2차 전지의 전략적 가치
6월 15일 미국과 이란이 휴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6월 17~18일 이틀간 전쟁 이후 최다인 18척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형 유조선(VLCC) 3척도 6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해협을 통과했다. 100일 넘게 막힌 중동 석유가 다시 시장에 풀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 미국과 이란의 협상 지연 등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글로벌 해운 업계도 여전히 상황을 보수적으로 보고 있다. 세계 최대 유조선사 MOL(일본)은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에 한 달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100일 넘게 이어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위기였다. 향후 벌어질 수 있는 에너지 위기는 전략비축유 방출 등 전통적 방식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수입 에너지에 의존하는 경제/사회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된다는 공감대가 세계 각국 정부와 에너지 업체들 사이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단기간에 에너지 수급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다.
중동 주변 국가 중 가장 먼저 대책을 발표한 국가는 인도다. 인도의 석유 소비량은 500만 BPD에 달하지만, 사태 당시 원유 재고는 일주일 치에 불과했다. 전국적인 LPG 부족으로 식당이 문을 닫고, 가정에서 요리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인도 정부는 국영 ONGC를 통해 망갈로르에 175만 톤 규모의 신규 석유 비축 기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향후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되고, 특히 호르무즈 해협 바깥쪽인 오만, 아프리카, 호주, 남미 등에 석유 비축 기지 건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셰일 가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시노펙(Sinopec)은 향후 10년 내 셰일 가스 생산량을 30%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중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지하 5km까지 채굴을 해야 셰일 가스를 생산할 수 있지만, 경제성이 아닌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화석 연료 재고와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에너지 소비 측면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최고가격제로 인해 휘발유, 경유 가격이 조절되었지만,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시민들은 정유 제품 가격 상승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미국 경유 가격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고, 미국 5월 소비자 물가(CPI)는 전년 동월 대비 4.2% 상승했다. 3년 만에 최고 수치였다.
아직 방향이 정해졌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정유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인해 유럽 전기차 판매량은 4월과 5월 연속으로 전년 대비 30% 이상 증가했다. 르노의 전기차 주문 잔고는 50% 늘었다. 전쟁 이전부터 전기차 판매 비중이 높았던 중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높아진 휘발유 가격으로 인해 신에너지차(EV/PHEV/HEV) 판매 비중이 63%까지 높아졌다. 신재생에너지발전 확대와 전력 에너지 사용 비중 확대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호주의 신재생에너지 신규 프로젝트 규모는 32.3기가와트(GW)까지 늘어났다. 전쟁 이전 대비 30% 늘어난 수치다. 1분기 호주 전력 거래 시장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이미 46.5%까지 높아졌다.
물론 이 전환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유럽 전기차 수요는 호르무즈 해협 개방 이후 유가의 움직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확대 역시 인/허가, 송전망 건설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에너지 전환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은 에너지 안보 강화에만 있지 않다. 달라진 전쟁의 방식 또한 세계 각국 정부의 국방 전략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 발에 몇 백만 달러가 넘는 토마호크 등의 유도 미사일에 몇 백억 달러를 썼지만, 전장을 뒤덮고 걸프 지역 에너지 시설을 파괴한 것은 샤헤드(Shahed)로 대표되는 이란의 드론이었다. 세계 최첨단 신기술이 총망라된 값비싼 정밀 무기에 값싼 드론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란 전쟁에서는 드론만 투입되었지만, 향후에는 해상, 육상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무인 무기가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 드론과 무인 무기를 움직이는 것은 2차 전지다.

2차 전지는 더 이상 전기차와 BESS(Battery Energy Storage System, 배터리 에너지 저장 장치)만의 산업이 아닐 수 있다. 이미 고성능 잠수함에 2차 전지가 사용되고 있다. 현재 세계 2차 전지 시장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양분하고 있다. 생산 원가 측면에서 중국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2차 전지 산업의 중요성이 국가 안보 차원까지 확대되면 관련 기업들에 대한 정책 지원 또한 과거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 2차 전지 기업들은 우리나라 방산 기업들 수준으로 중요성이 높아지게 될 수 있다. 2차 전지는 더 이상 가장 싼 곳에서 사 오는 부품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편에서 함께 만들어야 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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