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도 비축유 공급으로 원유 가격 안정세 유지
■ 장기화되는 전쟁 속 비축유 재고 감소로 향후 수급 불안 가능성 확대
■ 전략비축유 사례로 본 위기 대응 체계와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 부각
2월 28일 시작된 이란 전쟁은 이제 석 달을 바라보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대해 미국이 역봉쇄로 맞서면서 세계 원유 생산량의 20%가 발이 묶였다. 우회 송유관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과 UAE의 푸자이라항에서 하루 700만 배럴 정도의 공급이 이어지고 있지만 전쟁 이전에 비해 1,300만 배럴이 부족한 원유 수급 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정작 원유 가격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초반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유가는 조만간 150달러, 심지어 200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지만 최근 흐름은 100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선물 시장에서도 한때 배럴당 30달러에 이르던 1주일 선물과 1개월 선물 가격의 차이도 이제는 1달러로 거의 없어진 상황이다. 시장은 이 정도 충격은 충분히 견딜 수 있고, 이미 적응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가격 안정은 세계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비축유가 계속 공급되면서 공급 충격을 완화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제에너지기구(IEA) 주도로 세계 주요국은 총 4억 배럴에 달하는 비축유를 방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비축분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지난 3월 1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세계 석유 재고는 하루 480만 배럴씩 감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과거 중동 정세 불안에 따라 비축분 방출에 따른 재고량이 감소하는 일은 빈번했지만, 이번처럼 장기간에 걸쳐 감소하는 일은 없었다. 재고 감소가 이어지면서 현재 비축유 수준은 2018년 이래 최저 수준이다. 어쨌든 현재까지 비축유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평상시 석유를 비축하였다가 유사 시 사용한다는 개념은 미국에서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자국의 막대한 원유 생산량을 동원해 영국 등 연합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미국 자체 원유 생산으로는 공급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베네수엘라 등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석유 행정관 업무를 겸임하던 해럴드 이케스 내무부 장관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미래에 공급 차질의 위험을 예견하고 미국 내 석유 비축 필요성을 주장했다. 최초의 전략비축유(Strategic Petroleum Reserve, SPR)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곧 끝나면서 이런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국가 차원의 석유 비축 논의가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이어지던 1952년 광물정책위원회의 전략적 석유 비축을 시작으로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비축 제안, 1970년 석유 수입 통제 관련 각료 TF의 석유 비축 제안 등이 이어졌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개념은 위기를 겪기 전에는 수용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비축에 나선 것은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1975년 12월 포드 대통령이 최대 10억 배럴의 비축량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 에너지 정책 및 보존법(EPCA)에 서명하면서 석유비축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비축 장소는 멕시코만으로 정해졌다.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에는 저렴하고 안전한 석유 저장 방식인 소금 동굴이 해안선을 따라 500개 이상 집중되어 있었으며, 정유시설과 송유관 등 유통거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77년 4월 소금 동굴 매입으로 시작된 사업은 6월 지상 시설 건설, 7월 21일 41만 배럴의 사우디아라비아산 경질유 반입으로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이후 시설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최대 7억2천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전략비축유는 심각한 에너지 공급 중단에 대응하기 위한 전량 인출(full drawdown), 일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최대 3천만 배럴까지의 제한적 인출(limited drawdown), 시험적 판매 또는 교환을 위한 인출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전량 및 제한적 인출은 오직 대통령만이 승인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다.
전략비축유 재고는 2011년 7억2천6백만 배럴을 기록하였지만 이후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2022년 유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한 대규모 방출이 시작되면서 2023년 3억4천7백만 배럴까지 감소하였다. 이후 2026년 2월 기준 4억1천5백만 배럴까지 다시 증가했지만, 호르무즈 해협 봉쇄 대응을 위해 다시 방출되면서 5월 8일 기준 3억8천4백만 배럴까지 감소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8월까지 총 1억7천2백만 배럴을 방출하기로 결정했으며, 현재까지 약 3천1백만 배럴이 방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약 40%가 다른 국가로 수출되었다.

미국 전략비축유 재고 상황은 매주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의해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지만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비축량은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중국 정부가 2017년 이후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당초 2020년까지 국가 및 상업용 비축량을 합해 총 100일 치 수입량에 해당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비축량이 정확히 얼마인지,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인 여부는 어렵다.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중국의 비축량은 총 14억 배럴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5년산 원유 총 수입분인 42억 배럴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약 120일분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약 4억 배럴이 국가 비축분이고 나머지 10억 배럴은 민간이 보유한 재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석유 비축은 21세기 들어 시작되었다. 2001년 제10차 5개년 계획에 ‘국가전략석유 비축량 확보 및 국가 에너지 안보 수호’가 포함되면서 시작된 중국의 석유 비축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저장성(전하이, 저우산) 랴오닝성(다롄, 진저우), 산둥성(황다오) 신장(두산쯔, 산산), 간쑤성(란저우), 광둥성(잔장, 후이저우), 장쑤성(진탄), 톈진 등에 대규모 비축 기지가 순차적으로 건설되었다. 대부분의 석유비축 기지는 대형유조선 정박이 편리하고 대규모 석유화학 플랜트가 위치한 곳에 거대한 지상 저장 탱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진저우와 황다오의 비축기지는 수십 미터 깊이의 지하 자연 암반을 주요 구조물로 사용하고 지하수를 밀봉재로 활용하여 건설된 수밀동굴 시스템이다. 지하 저장 시설은 대용량 저장, 낮은 건설 및 운영비용, 각종 공격이나 재해에 대한 저항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입지가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내륙 북서부에 위치한 두산쯔, 산산, 란저우에 건설된 비축기지는 안보상 이유로 건설되었다. 이곳에 비축되는 원유는 신장을 경유해 송유관으로 수입되는 카자흐스탄산이다.
미국, 중국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대규모 비축을 통해 원유 공급 차질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다. 문제는 재고가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JP모건의 예측에 따르면 OECD 국가들의 경우 6월까지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 이후에는 문제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물량 자체가 바닥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재고 감소로 인해 송유관 및 정유시설 가동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비축유는 이번과 같은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비싼 비용을 들여 채굴한 원유를 다시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저장시설에 부어놓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비효율의 극치다. 하지만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이번 위기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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