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요약
- 단고테 정유소 가동으로 석유제품 수입 의존을 줄이고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나이지리아
- 중동발 공급 차질 속 아프리카·유럽 시장으로 확대되는 나이지리아의 석유제품 공급
- 초대형 정유설비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선 한국 정유산업의 고도화와 운영·원유 조달 경쟁력 강화 필요
1964년 4월, 하루 3만5천 배럴의 원유를 정제 처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공장이 울산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 정유공장들이 풀 가동할 경우 하루에 정제할 수 있는 원유의 양이 340만 배럴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아담한 규모였다. 이렇게 시작한 대한민국의 정유산업은 이후 지속적인 설비확장과 고도화를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를 세계적인 석유류 제품 수출 국가로 만드는 기적을 연출했다.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지정된 울산산업단지에 최초로 자리잡은 것이 이 정유공장이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은 정유산업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산업화의 역사는 SK이노베이션의 역사이기도 하다.
| 원유를 수출하고 연료를 수입하던 나이지리아
우리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나라가 있다. 아프리카 최대 인구를 보유한 나이지리아다. 나이지리아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71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하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산유국으로 자리잡았다. 원유는 오랫동안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2026년 6월 기준으로 나이지리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56만 배럴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국민의 생활은 풍요로운 산유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유를 수출하지만 정작 자동차에 필요한 휘발유와 공장에서 사용되는 경유는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이지리아에도 정유공장이 있다. 국가가 운영하는 네 곳의 정유소가 있지만 노후화와 부실한 운영, 잦은 고장으로 인해 제대로 가동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정제능력은 하루 44만 5천 배럴이지만 실제 생산량은 이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2023년 나이지리아의 석유류 제품 수입량은 하루 약 40만 배럴이었다. 원유를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 상당 부분을 다시 석유류 제품을 수입하는데 사용해야만 했다. 국제유가가 상승하더라도 오히려 석유류 제품 수입 부담이 커졌고,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환율이 약세로 전환되면 국내 연료가격은 급등했으며,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나이지리아뿐만 아니라 많은 산유국의 현실이 비슷하다.
| 수입 의존을 바꾸기 위한 알리코 단고테의 도전
하지만 최근 나이지리아는 달라지고 있다. 변화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알리코 단고테(Aliko Dangote)다. 1957년생인 그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기업인이자 최대의 부자로 유명하다. 그의 시작은 1970년대 쌀과 설탕, 시멘트를 거래하는 사업이었다. 정부의 수입 허가만 받는다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입에 의존해서는 영원히 아프리카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수입으로 번 돈으로 생산시설을 건설해 아프리카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사업 모델을 전환했다. 시멘트 공장을 건립하고, 생산능력을 계속 확장하면서 나이지리아를 시멘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시켰다.
부호가 된 그의 다음 목표는 석유였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 휘발유를 수입하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구상이었다. 단고테는 나이지리아 경제 중심지인 라고스 동쪽에 위치한 레키(Lekki)지역에 200억 달러를 투자하여 거대한 정유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정부 지원 없이 아프리카의 민간기업이 과연 그만한 투자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지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공사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자금 부족과 더불어 나이지리아의 고질적인 인프라 부족이 공기를 지연시켰다. 이 와중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사업은 계속 지연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2024년 1월 단고테 정유소는 상업 운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을 완공한 이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세계적인 산유국에 위치한 정유공장이었지만 정작 자국내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원유 생산업체들의 기존 수출계약과 공급 의무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면서 단고테는 미국 등 해외에서 비싼 원유를 수입해 공장을 돌려야 했다. 석유류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던 업체들과의 갈등도 심각했다. 2024년에는 정부 규제기관이 단고테 정유소에서 생산되는 경유 품질에 문제를 제기하자 이에 단고테가 직접 이를 반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단고테는 기존 수입업계와 규제 당국이 자신의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장 건설보다 더 어려운 것이 고착화된 석유산업 이해관계를 바꾸는 일이었던 셈이다.
|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나이지리아의 석유제품
하루 65만 배럴의 처리능력으로 계획되었지만 초기에는 여러 문제로 인해 가동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추가적인 투자를 통해 설비를 안정화시키고 개선작업을 마무리한 것은 올해 2월이었다. 이제 단고테 정유소의 정제능력은 하루 70만 배럴로 늘어났다. 본격적으로 공장이 가동되자 나이지리아 석유산업의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올해 8월에 발표된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3년 하루 평균 4만6천 배럴에 불과하던 나이지리아의 해상 석유제품 수출량은 올해 2분기 35만 배럴로 급증했다. 불과 3년 사이에 7.6배로 늘어난 것이다. 국내 항구 사이를 이동하는 물량까지 포함한 해상 운송량은 같은 기간 하루 7만 9천 배럴에서 56만1천 배럴로 증가했다.

당연히 석유류 제품 수입은 급감했다. 2023년 하루 40만 배럴이던 수입량은 올해 2분기 13만 배럴 미만으로 줄었다. 나이지리아는 해외로 대량의 석유류 제품을 수출하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지역으로 향하는 수출 물량은 하루 12만 배럴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아프리카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3년 하루 1만5천 배럴에 머무르던 유럽으로의 석유제품 수출이 26년 2분기에는 13만 배럴로 증가했다. 과거 유럽 정유소에서 생산된 석유제품을 수입하던 아프리카가 이제 유럽에 석유제품을 수출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이란 전쟁 때문이다. 2026년 3월부터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세계 원유 및 석유제품 수급은 심각한 차질을 빚어왔다. EIA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석유제품 등의 물동량은 2025년 4분기 하루 2160만 배럴이었지만 2026년 6월 말에는 490만 배럴로 감소했다. 특히 석유류 제품 통과량은 하루 570만 배럴에서 110만 배럴까지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지리아의 석유류 제품 수출 증가는 세계 시장의 공급 부족을 일부 메워주고 있다. 과거 수입에 의존하던 나라가 이제 국제 석유 시장의 공급불안을 완화하는 공급자로 역할을 전환한 것이다. 단고테의 도전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하루 140만 배럴까지 정유능력을 확장하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만약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 석유류 제품 시장에서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새로운 경쟁자의 부상과 한국 정유산업의 과제
나이지리아의 변화는 우리 정유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우리의 시장이라고 생각되었던 많은 지역들이 이제 자체적인 설비를 구축하고 수출시장에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다.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 많은 곳에서 초대형 정유 설비들이 건설, 계획되고 있다. 124만 배럴에 이르는 정유 능력과 더불어 216종 이상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단일 부지 기준 세계 최대 정유단지인 인도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의 잠나가르 정유공장이 대표적이다.
원유를 수입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고도화 설비와 효율적인 운영, 원유 조달의 유연성, 석유화학과의 연계 등을 통해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것이 생존을 위한 과제가 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시대에도 안정적인 석유제품 공급은 경제성장의 중요한 조건이다. 석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석유로 가치를 만들어 내는 나라와 기업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단고테 정유소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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