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유 산업, 국가 시스템의 숨은 심장

2025. 08. 18 최지웅, 한국석유공사 스마트데이터센터 차장 5분 읽기

석유와 가스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가 석유와 가스 수입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의 석유와 가스 수입액은 1,397억 달러에 달했는데, 원화로는 약 200조 원에 이른다. 이는 국가 전체 수입액의 22%를 차지하며 GDP의 약 7.5%에 해당하는 규모다. 같은 해 국방 예산의 세 배를 초과하고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전체 수출액과 비견될 만큼 막대한 규모다. 석유와 가스는 단순한 에너지 자원을 넘어, 대한민국 경제의 외연을 규정하고 내부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요인인 것이다.

둘째는 위와 같은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현실’을 잊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정유 산업을 보유하고 있고, 그것의 경제적 기여와 전략적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유 업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준의 정제 기술과 설비를 바탕으로 원유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가공하여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는 약 850억 달러 규모의 원유를 수입 후 이를 정제 가공하여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으로 전환해 약 500억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석유제품 수출 규모는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세 번째로 컸다.

| 정유 산업은 경제 발전의 기반이자 동력

SK이노베이션 울산Complex 전경

우리나라와 같이 석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큰 나라에서 정유 산업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유 산업은 국제유가 변동의 충격을 완화할 뿐 아니라, 산업계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 역할을 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안정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 초기부터 정유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했다. 1962년 한국 정부는 미국 걸프(Gulf)사와 합작해 독점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했다. 이후 대한석유공사는 경제 개발과 공업화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석유 및 석유제품의 안정적 공급을 담당하며, 말 그대로 국가 기간산업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유산업의 본격적인 성장은 1980년대 민영화 이후에 이뤄졌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의 민영화로 탄생한 SK이노베이션은 울산Complex(울산CLX)를 중심으로 대규모 정유 단지를 구축하며, 국가 산업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을 했고, 동시에 윤활유, 석유화학 등 고부가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수출 증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정유 산업은 대한민국이 단순한 자원 소비국에 머물지 않고, 자원을 ‘전략 자산’으로 전환하며 기술 기반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이후 석유제품은 반도체와 자동차 이상으로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동시에 정유 산업은 반도체·자동차·철강 등 에너지 다소비 제조업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기반 산업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정유 산업은 고유가 시기의 원유 수입액 증가를, 정제마진을 기반으로 한 석유제품 수출 증가로 상쇄하며 무역수지를 방어해 왔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유뿐 아니라 석유제품도 수입했다면 정제 비용에 막대한 국부를 지출함과 동시에, 유가의 극심한 변동성도 완충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경제는 항시 더 큰 불확실성을 마주했을 것이다.

|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전략적 가치

정유 산업의 중요성은 경제적 가치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석유를 전량 수입한다. 따라서 천재지변, 전쟁, 테러 등에 의한 갑작스러운 원유 공급 차단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정량의 원유를 비축해둬야 한다. 원유 공급이 하루라도 끊긴다면, 일상과 산업은 마비되고, 국방에도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서구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에너지기구(이하 IEA)를 설립했고, IEA는 회원국들에게 자국 석유 순수입량의 90일 이상을 비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IEA 회원국 중에서도 드물게 200일이 넘는 석유 비축 물량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웬만한 글로벌 공급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대규모 비축이 가능한 배경에는 우리 정유 산업의 압도적인 규모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석유 비축은 한국석유공사가 중심이 되어 수행한다. 한국석유공사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전략비축유를 확보하고, 이를 전국 각지의 비축기지에 분산 저장함으로써 에너지 위기 대응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와 함께 정유사들 역시 정제 공정을 원활히 가동하고 내수 및 수출 수요를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일정 수준의 재고를 유지한다. 여기에 더해 정유업계도 정부 정책에 따라 일정량의 석유를 추가로 비축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총 석유 비축일수의 절반인 약 100일분의 비축이 정유업계에 의해 이뤄진다. 이러한 민관 협력 구조 속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석유 비축 능력을 갖춘 것이다.

정유 산업은 우리 산업 전반에 연료를 공급하며 경제를 생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시적으로 높은 수준의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게 함으로써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하고, 국가 경제의 운영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원유는 수입이지만 그것을 가공한 석유제품이 국산인 현실에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잊게 된다.

| 에너지 전환의 플랫폼 기업 역할 기대

에너지 전환의 성공은 정유산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은, 막대한 자본과 높은 기술 역량을 요하는 구조적 전환이다. 저탄소 에너지 사업은 정유 산업 및 기술, 그리고 밸류체인이 서로 긴밀히 맞물려 있다. 특히 바이오연료, 수소, 암모니아, 탄소포집 및 저장(CCS)과 같은 핵심 저탄소 기술의 다수는 기존 정유·석유화학 인프라 위에서 구축될 수 있다. 아울러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소재 경량화 및 고기능성 소재 개발도 석유화학산업이 해내야 할 몫이다.

실제로 주요 글로벌 정유기업은 정제 역량을 넘어 CCS, 수소 생산, 재생에너지 개발 등 탈탄소 전환의 선도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정유 산업이 저탄소 기술과 기존 인프라를 연결하는 토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SK이노베이션은 기존 인프라에 기반한 기술 융합과 사업 전환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정유를 넘어선 ‘에너지 전환의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 숨은 심장에서 전환의 중심으로

정유 산업은 가장 꾸준한 수출 상품의 주체이자, 국가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의 핵심으로 기능해 왔다. 물론 이러한 정유 산업의 역할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효율적 정제 과정과 고도화된 설비를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정제 기술은 다시 석유화학, 윤활유, 바이오연료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확장되며, 끊임없는 혁신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SK이노베이션의 성장과 혁신은 대한민국의 산업화 초기부터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핵심 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대비하는 에너지 전환의 중심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앞으로도 SK이노베이션이 기업의 진화가 곧 국가 경쟁력의 진화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