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요약
- 화재 이후 위축됐던 국내 ESS 시장… 1·2차 중앙계약시장을 통해 총 1,128MW·약 6.8GWh 규모의 신규 수요 형성
- 가격 중심이던 경쟁 기준이 국내 생산·소재 공급망·화재 안전성으로 확대… SK온은 서산 LFP 배터리 생산과 국내 소재 조달 전략으로 2차 입찰 284MW 확보
- 중앙계약시장과 AI 활용 배전망 ESS, 2028·2029년 도입 계획으로 수요처 다변화… 셀을 넘어 소재·부품·시스템까지 K-배터리 생태계 확장 주목
작년 5월, 제1차 에너지저장장치(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이 시작될 당시 국내 배터리 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장기화된 전기차 수요 둔화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생산라인의 가동률은 떨어졌고, 빠르게 몸집을 키운 중국 배터리 업체들과의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던 시기였죠. 실제 국내 배터리 3사의 생산설비 가동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새로운 수요처를 확보하는 것이 업계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새로운 수요처를 찾던 업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ESS로 향했습니다. 마침 국내에서는 중앙계약시장을 통해 수 기가와트시(GWh) 규모의 신규 수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배터리 업체들에는 생산라인의 활용도를 높이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커질 ESS 시장에서 운영 이력을 쌓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제3차 입찰을 앞둔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전기차 시장의 불확실성은 여전하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판매가 회복되고 있고, 배터리 업체들의 생산 시설 가동률에도 조금씩 반등 신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로 ESS가 배터리 업계의 핵심 성장 축으로 떠올랐습니다.

세 번째 중앙계약시장 입찰은 단순히 추가 물량을 확보하는 수주전을 넘어 국내 배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진일보하기 위한 또 다른 한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1·2차 입찰을 거치며 국내 생산과 소재·부품 공급망, 안전성과 장기 운영 역량의 중요성이 커진 만큼 3차 입찰이 국내 ESS 산업 생태계를 얼마나 더 넓힐 수 있을지도 지켜볼 대목입니다.
| 1·2차 입찰로 커진 국내 ESS 시장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전력거래소가 주도하는 ESS 중앙계약시장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전력 계통에 필요한 대규모 저장장치를 경쟁입찰을 통해 확보하는 제도입니다. 사업자로 선정되면 ESS를 구축한 뒤 15년간 전력 계통 자원으로 운영하게 됩니다.
지난 2025년 5월 22일 공고된 제1차 중앙계약시장에서는 육지 500메가와트(MW)와 제주 40MW 등 총 540MW를 대상으로 경쟁입찰이 진행됐고, 최종적으로 8개 사업에서 563MW가 선정됐습니다. 제2차 시장에서는 565MW가 선정되면서 두 차례 입찰을 통해 총 1.128GW, 6시간 연속 방전 기준 약 6.8GWh 규모의 ESS 수요가 만들어졌습니다.
1차에서는 삼성SDI가 427MW를 확보하며 가장 앞섰고 LG에너지솔루션이 136MW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제안 물량의 67.9%가 리튬인산철(LFP)이었지만, 최종 낙찰에서는 니켈·코발트·알루미늄(NCA) 삼원계 배터리가 75.9%를 차지했습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LFP가 빠르게 영역을 넓히던 상황에서도 국내 생산 기반과 안전성, 공급망 등을 아우르는 경쟁력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어진 2차 입찰에서는 SK온이 전체 선정 물량의 절반에 가까운 284MW를 확보하며 판도를 바꿨습니다. SK온은 1차에서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뒤 충남 서산공장의 기존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 LFP 라인으로 전환해 3GWh 규모의 생산능력을 구축하는 계획을 내놨습니다. 양극재와 분리막, 전해액 등 주요 소재도 국내 기업에서 조달하는 공급망 전략을 함께 제시했습니다. 그 결과 2차에서 최대 물량을 확보했고,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은 각각 202MW와 79MW를 가져갔습니다.

| 가격에서 공급망·안전으로 넓어진 경쟁
1·2차 입찰 결과를 보면 중앙계약시장이 어느 한 배터리 화학계에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격과 수명, 열적 안정성을 앞세운 LFP가 빠르게 시장을 넓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 국내 생산 기반과 소재 공급망을 갖춘 삼원계 배터리 역시 꾸준히 성과를 내왔죠.
특히 2차에서는 가격과 비가격 평가 비중이 60대40에서 50대50으로 조정되면서 산업·경제 기여도와 화재·설비 안전성이 차지하는 무게가 한층 커졌습니다. 비가격 평가에서도 계통연계와 산업·경제 기여도, 화재·설비 안전성에 각각 25점이 배정돼 세 항목만으로 전체 비가격 점수의 75%를 차지하도록 했습니다. 반면 기술 능력과 주민 수용성·사업 준비도·사업 신뢰도 등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세부 기준도 한층 촘촘해졌습니다. 산업·경제 기여도에서는 배터리 셀뿐 아니라 양극재·음극재·분리막·전해질 등 주요 소재의 원산지와 공급망 안정성, 국내 생산과 고용, 유지보수 및 부품 조달 능력까지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화재·설비 안전성에서는 배터리 자체의 화재 안전성과 예방·대응 체계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였습니다. 단순히 싼 ESS를 구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장기간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지를 더 비중 있게 보기 시작한 셈입니다.

SK온은 이에 맞춰 서산 ESS용 LFP 생산과 국산 소재 중심의 공급망, 안전관리 기술을 앞세웠습니다. 특히 양극재 기업인 엘앤에프와 LFP 양극재 공급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고, 분리막을 만드는 더블유씨피(WCP)와도 거래를 트며 국내산 공급망관리(SCM) 체계를 한층 강화했죠. 세부 평가점수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생산과 공급망을 적극 활용한 전략이 강화된 비가격 평가와 맞물려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배터리 셀 업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중앙계약시장에서는 양극재·음극재·분리막·전해질 등 주요 소재의 원산지와 공급 안정성은 물론 BMS(Battery Management System)·EMS(Energy Management System)·PCS(Power Conversion System)와 같은 시스템 구성, 국내 유지보수 역량까지 평가합니다. 입찰이 이어질수록 소재·부품과 전력기기 업체들도 ESS용 제품과 공급망을 갖출 이유가 생기죠. 전기차 수요 변화로 활용도가 낮아진 국내 생산설비를 ESS용으로 전환하거나 별도의 생산능력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안정적인 수요가 뒷받침돼야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침체 넘어 회복기로, 다시 움직이는 국내 ESS 시장
국내 ESS 산업이 한 차례 큰 부침을 겪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최근의 변화는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ESS 시장이었습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2018년 국내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 ESS 시장은 약 5.6GWh로, 글로벌 시장 11.6GWh의 절반가량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잇따른 ESS 화재로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신규 발주와 설치가 빠르게 줄었습니다.
이듬해 국내 시장은 약 3.7GWh로 34%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같은 기간 글로벌 시장은 11.6GWh에서 16GWh로 약 38% 성장했습니다. 세계 ESS 시장이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드는 동안 국내 시장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입니다.
최근에는 당시와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 ESS 보급 확대가 요금제나 설치 인센티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지금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계통 안정이라는 구조적인 필요가 수요를 만들고 있습니다. 중앙계약시장을 통해 장기간 운영할 대규모 ESS 물량이 꾸준히 나오고, 기업들도 이에 맞춰 국내 생산과 공급망을 다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 ESS 수요도 중앙계약시장 하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한국에너지공단이 운영하는 AI 활용 ESS 구축 지원 사업을 통해 배전망에서도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가 집중된 지역의 배전 선로에 ESS를 설치해 추가 태양광 발전설비를 받아들이고, 가상발전소(VPP)와 AI를 활용해 충·방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입니다. 중앙계약시장이 대규모 전력 계통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면 배전망 ESS는 지역 단위의 계통 병목을 풀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 K-배터리 생태계, 다시 성장 기반을 넓힐 때
앞으로 중앙계약시장 규모가 어디까지 커질지도 관심사입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2028년과 2029년 각각 540MW, 600MW의 ESS 도입 물량이 예정돼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3차 입찰에 당초 계획보다 더 많은 물량이 배정될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실제 물량이 늘어난다면 국내 배터리 셀과 소재·부품뿐 아니라 시스템과 설계·조달·시공(EPC) 분야까지 사업 기회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제3차 중앙계약시장의 의미를 배터리 3사 가운데 누가 가장 많은 물량을 가져가느냐에만 둘 필요는 없습니다. 중앙계약시장과 배전망 ESS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실질적인 수요가 다시 살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차를 거치며 가격뿐 아니라 국내 생산과 공급망, 안전성과 장기 운영 역량까지 경쟁 요소로 자리 잡은 만큼 앞으로는 셀 업체를 넘어 소재·부품과 시스템 기업까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넓혀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ESS 설치량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전력망의 필요에서 만들어진 수요를 국내 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정책을 세밀하게 다듬고 업계와의 논의를 이어간다면 국내 ESS 시장도 단순한 수요 창출을 넘어 산업과 기술 경쟁력을 함께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제3차 중앙계약시장 입찰이 그 흐름을 한 단계 더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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